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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2 숭례문 : 남대문도 맞는 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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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이 불타버려서 꽤 맘도 아프고, 왜 맨날 이모양인지 짜증도 나고 그러다가 슬슬 마음의 정리도 좀 되고 그래서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글을 읽어보고 그러는데 일제시대 때 부터 숭례문을 남대문이라고 했다고 하면서 남대문이라고 쓰면 마구 욕하는 사람들이 꽤 있길래 잠시 여기에 정리를.



조선왕조실록은 예전에는 CD로만 나와서 꽤 비싸게 팔렸는데 지금은 인터넷으로 열람할 수 있다. 홈페이지는 http://sillok.history.go.kr 이다.

물론 태조 5년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남대문과 동대문이라는 이름은 속칭이고 정식 명칭은 숭례문이니 공적인 자리에서는 숭례문으로 쓰는게 맞을거 같다.


조선왕조실록에서 崇禮門을 검색하면
태조(1) | 태종(20) | 세종(16) | 문종(1) | 단종(2) | 세조(6) | 예종(2) | 성종(13) | 연산군(7) | 중종(21) | 인종(1) | 명종(11) | 선조(18) | 선조수정(1) | 광해군일기(중초본)(7) | 광해군일기(정초본)(7) | 인조(13) | 현종(1) | 현종개수(2) | 숙종(8) | 숙종보궐정오(1) | 경종(1) | 영조(24) | 정조(8) | 순조(3) | 철종(0) | 고종(5) |

南大門을 검색하면
태조(1) | 태종(5) | 세종(12) | 세조(5) | 예종(1) | 성종(7) | 연산군(2) | 중종(17) |  명종(3) | 선조(57) | 광해군일기(중초본)(26) | 광해군일기(정초본)(21) | 인조(4) | 현종개수(1) | 숙종(2) | 경종수정(0) | 영조(4) | 순조(2) | 고종(3) | 순종(6) | 순종부록(53)

이렇게 나온다. 비슷하게 섞여있는게 딱히 무슨 왕때는 남대문, 무슨 왕때는 숭례문 이런 식으로 이름을 사용한건 아닌듯 싶다. 마지막에 순종부록에 압도적으로 남대문이라는 말이 많이 쓰였는데 당시 남대문에 기차역이 있어서 조선 정부가 누군가를 보내거나 맞는 일을 대부분 남대문역에서 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내용 중 초기 역사 쪽에서 두가지만 옮긴다.


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9월 24일(기묘) 2번째기사

○築城役訖, 放丁夫。 其春節所築, 有因水湧頹圯者, 以石城築之, 間以土城; 雲梯爲雨水所衝, 以致圯毁處, 復築之; 又置雲梯一所, 以分水勢, 石城有低下者, 加築之。 又作各門月團樓閤。 正北曰肅淸門, 東北曰弘化門, 俗稱東小門。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東南曰光熙門, 俗稱水口門。 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 小北曰昭德門, 俗稱西小門。 正西曰敦義門, 西北曰彰義門。


성 쌓는 역사를 마치고 정부(丁夫)들을 돌려보내었다.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石城)으로 쌓고 간간(間間)이 토성(土城)을 쌓았다. 운제(雲梯)도 빗물로 인하여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다시 쌓고, 또 운제(雲梯) 1소(所)를 두어서 수세(水勢)를 나누게 하고, 석성(石城)으로 낮은 데가 있는 데는 더 쌓았다. 또 각문(各門)의 월단 누합(月團樓閤)을 지었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태종 28권, 14년(1414 갑오 / 명 영락(永樂) 12년) 7월 21일(임진) 1번째기사

○壬辰/命搆都城左右行廊。 上曰: “自鍾樓至南大門, 自宗廟前樓門至東大門, 左右欲建行廊。 予旣斂怨於民, 寧畢造以燕翼子。 宜以忠淸、江原兩道年例斫取材木, 營之。” 朴信韓尙敬鄭擢黃喜等曰: “年例材木, 恐未周足, 宜於忠淸、江原水邊各郡, 量宜分定。” 又請復置別窰, 以備蓋瓦, 上皆許之。 命朴子靑督其役, 發兩界各道僧軍六百名、京畿ㆍ豐海道船軍一千名, 以赴其役。

도성(都城)의 좌우 행랑(左右行廊)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종루(鐘樓)에서 남대문(南大門)에 이르기까지 종묘(宗廟) 앞 누문(樓門)에서 동대문(東大門) 좌우에 이르기까지 행랑(行廊)을 짓고자 한다. 내가 이미 백성들에게 원망을 들었으니, 오히려 조성(造成)하기를 끝마쳐서 자손을 연익(燕翼) 하겠다. 마땅히 충청도·강원도 양도의 연례로 작취(斫取)하는 재목(材木)을 가지고 짓도록 하라.”


박신(朴信)·한상경(韓尙敬)·정탁(鄭擢)·황희(黃喜) 등이,


연례의 제목(材木)으로는 두루 족(足)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충청도·강원도의 물가 각 고을에 적당히 혜아려 분정(分定)하여야 합니다.”


하고, 박신이 또 별요(別窯)를 다시 두어서 개와(蓋瓦)를 준비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고, 양계(兩界)·각도(各道)의 승군(僧軍) 6백 명과 경기(京畿)·풍해도(豐海道)의 선군(船軍) 1천명을 징발하여서 그 역사에 나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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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6년 9월 24일 사대문 건설을 마치고 인부들을 다 돌려보냈다는 기사가 지금 보니 왠지 생생하게 들린다. 참고로 숭례문은 2번에 걸쳐서 보수를 했는데 그때 참여한 장인들, 인부들 이름을 정리한 기록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그건 남아있나 모르겠다. 2층에 있던 문화재들도 꽤 있었다던데.

개인적으로는 복원 하지 말고,
우리가 뭘 잘 못하고 있는지 끝까지 기억시켜 주고, 불만 나면 원상 복귀 가능 운운하는 (문화재 관리 담당 부서는 당연히 보존이 가장 중요한 임무지 불날때 까지 내버려 뒀다가 복구 계획 발표하는 곳이 아니다, 완전 복불복 마인드잖아 이거) 국가 및 지방 정부에 대한 교훈으로써 남겨놨으면 좋겠는데 너무 서울 한복판이라 뭐든 하겠지 싶다.

어쨋든 이제는 없어져버린 문, 완벽한 원상 복귀가 불가능한 문이 되었다. 경복궁 구경갔을때 건물 옆마다 써있는 제작 연도에 천구백구십몇년 이런거 써있는걸 보고 안타까워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내가 나이가 좀 더 들어 숭례문에 찾아가면 2010년 복원 이런 글귀가 써있겠구나.



Posted by macrostar_everybo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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