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분투를 켜고 이걸 쓰다가 날려먹었다. 구글 블로그는 기본적으로 자동 저장을 하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공민왕이 즉위했을 당시 고려는 원(몽고) 지배 하에 있었다. 막강한 원의 세력 덕분에 고려 내에서도 친원 세력과 권문 세가들의 보수 정치의 폐단이 만연해 있었다. 이러쿵 저러쿵 해도 폐단의 핵심은 토지의 점탈이다.
공민왕은 즉위 후 원의 연호, 관제를 폐지하고 내정 간섭을 하던 사법 기관 이문소를 폐지한다. 그리고 친원파와 권문 세가들을 숙청하고 원의 직속령이었던 쌍성총관부를 탈환한다. 이는 원이 세퇴해 가고 신진 국가인 명나라의 세력이 커지고 있는 당시 세계 정세를 읽은 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물론 친원파와 권문 세가들의 반발이 있었고 부인인 노국대장 공주가 난산으로 사망한 일도 겪는다. 공민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신돈을 기용해 개혁을 주도하게 한다. 신돈은 보수 세력이 불법 탈취한 토지를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 시키는 등의 개혁을 한다.
그리고 공민왕은 성균관을 다시 부흥시켜 당시 시대상황으로는 래디컬한 사상이었던 성리학을 공부한 학자들을 무더기로 배출시킨다.
결국 개혁은 실패하는데 신돈의 악행과 공민왕의 실수 등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이나 신돈 같은 개인이 일사천리로 진행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될 수도 없는 일이다.
무슨 개혁이든 적어도 위 아래 모든 계층의 1/3이라도 포섭하는 공통된 마인드가 있어야 하는데 오직 위에서 아래로의 개혁만이 있었다. 물론 이는 시민 교육을 의도적으로 등한시 시킨 원의 책략도 숨어있다. 우민 정책만큼 효과적인 개혁의 장애물은 없다. 공민왕은 실의에 빠져있다가 결국 시해당한다.
그리고 우왕이 즉위하고 극단적인 반동 보수 정치가 시작된다. 원의 쇠퇴와 함께 친원파 세력이 조금은 수그러들었지만 기존 권문 세력의 횡포는 제어가 불가능했다. 토지 겸병이 자행되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다”는 말이 돈다. 그리고 이들은 새로 부흥하는 명을 적대시하고 망해가는 원을 가까이하는 시대 역행적인 외교를 펼친다.
이런 극단적인 보수 반동 정치는 공민왕 시절의 개혁 정치가 실패했던 원인 중 한가지인 공통된 마인드 형성에 이바지한다. 도저히 이대로는 살 수 없다라는 생각이 횡횡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성균관을 나온 개혁 성형의 학자들이다.
이렇게 혁명의 조건은 완벽히 갖춰졌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민중 혁명은 일어나지 못하는데 성균관을 나오는 부르주아들이 시민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이 왕조 개창에 성공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성계를 위시로 한 무장 세력의 도움이 컸다.
결국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우왕, 창왕을 차례로 내쫓고 공양왕 시기에 토지 개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공양왕 2년에 옛 토지 대장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공양왕 3년에는 전격적으로 과전법을 실시 우리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인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 개혁을 실시한다(북한은 광복이후 실시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392년 7월 17일 도평의사사의 인준으로 조선왕조를 개창한다.
**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혁명은 어느 정도의 세력 형성이 없으면 실패한다. 이건 모든 분야에서 마찬가지다. 보수 세력의 이권을 위한 결집은 대단히 큰데 그에 대항하는 자들이 가질 모티베이션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순이 어지간히 커지지 않으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2차 대전 이후 영미, 유럽권 국가들은 그런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정치가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이런건 전후 50여년이 지나고, 전후 세대가 주도가 되어 그런 모순의 극단화된 상황에 대한 기억이 없는 자들이 신자유주의라는 극단적인 사상을 등장시키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개혁에 위아래 공통된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는건 아주 소소한 이야기에도 응용할 수 있다. 모바일 산업의 발전은 눈부시지만, 통신 3사의 담합에 익숙해져있는 대다수의 국내 소비자들은 통신 3사가 제공하는 사고의 틀에 얽메어 있다. 그래서 뭐가 잘못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생산자와 서비스 프로바이더)이 찔끔찔끔 보여주는 기술의 일면에 감탄하도록 인식이 재구성되어진다.
이런건 단지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경쟁이 훨씬 치열해 할 수 없이 여러 기술을 미리 미리 내보내야 하는 영미, 유럽권 국가에서도 소비자들은 통신 요금이라는 벽 때문에 사고에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모든게 무상으로 공급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건 사실 필연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치열한 경쟁 상황”이 그나마 소비자들의 편의를 더 낫게 만들어주고 있다.